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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수정(2015-11-30)

- 매끄럽지 않은 문단들 수정

- 추가 설명 보충.

- 문단에 어울리지 않는 설명을 추가항목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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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수정(2016-07-20)

- 여성혐오 정의 추가

- 필요없는 문단 삭제

- 기타 문맥상 매끄럽지 않은 문장/문단들 정리










단간론파 어나더:희망봉 학원에 '진정한 여성'은 없었다


부제:여혐 코드로 읽는 단간론파 어나더


2013년 1월 6일, 단간론파 어나더라는 이름의 한 쯔꾸르 게임이 제작자의 티스토리에 올라온다. 그 게임은 처음에는 조잡한 그래픽으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 파격적인 스토리 전개, rpg2000툴의 한계를 넘는 준수한 연출로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n달을 주기로 한 챕터씩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는 날마다 제작자의 블로그는 소문을 듣고 게임을 즐기러 온 골수팬들로 북적거렸다. 

적절한 피드백과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그래픽 제작 실력을 기반으로 서서히 팬층이 두꺼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5월 10일, 장장 2년간의 대장정 끝에 단간론파 어나더라는 작품은 완전판을 업데이트하며 막을 내린다.

이미 단간론파 어나더라는 하나의 작품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으나, 아직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많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BJ들 중 한 명인 '대도서관'을 필두로 수많은 BJ들은 단간론파 어나더를 실황하기에 이르렀다. 긴 플레이타임과 단간론파 원작의 팬층을 타깃으로 잡은 작품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이 단간론파 어나더를 플레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작을 초월하는 튼튼한 스토리와 절망적인 이야기 전개,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던 결말, 깔끔한 복선 회수 등등은 한국의 쯔꾸르 게임 중에서도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아낌없이 받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과연 단간론파 어나더는 극찬 받을 만한 작품인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작품은 없다. 특히나 단간론파 어나더가 잘 만든 작품이라고 세간에서 평가되고 있는 만큼, 아쉬운 점들도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막장으로 치닫는 스토리텔링, 특정 챕터의 불친절한 전개,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어정쩡한 학급재판, 특정 캐릭터의 비중 증가로 공기가 된 캐릭터의 존재... 등등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나는 제작자의 여성에 대한 젠더 감수성의 부족에 주목하고 싶다.

단간론파 어나더의 여혐 코드에 대해서는 이미 트위터에서 올해 초부터 꾸준하게 이야기가 나오던 사안이지만, 누군가의 확실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리뷰를 겸하며 몇 자 적어보게 되었다.






이 글은 단간론파 어나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 글을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 여성혐오가 뭐지?

: 보통의 인간이 될 수 없는 여성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그간 받은 피드백중 가장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던 부분에 대해 먼저 집고 넘어가겠다. 특히나 "여성 혐오"라는 단어에서 거부감을 느끼고 일방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많았다. 여성혐오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여성혐오(女性嫌惡, misogyny 미소지니) 또는 여성증오(女性憎惡)는 여성에 대한 혐오나 멸시, 또는 반여성적인 편견을 뜻한다. 이는 성 차별, 여성에 대한 부정과 비하, 여성에 대한 폭력, 남성우월주의 사상,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포함한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며, 고대 세계에 관한 신화 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 신화(설화) 속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많은 서양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여성혐오적이라 묘사된다.

(출처:여성혐오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C%84%B1%ED%98%90%EC%98%A4 )

쉽게 말하자면 여성을 보통의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혐오를 넘어 모성애에 대한 추앙, 김치녀에 대한 멸시와 비판, 섹슈얼리티즘의 대상화 전부 여성혐오의 범주에 포함된다. 가부장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한국의 경우 여성혐오는 거의 공기와 같이 삶에 스며들었고, 사소한 여성에 대한 차별들은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일상에서의 성폭력, 성차별, 유리천장 등등. 셀수 없는 여성 혐오는 여성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이상 여성혐오적인 사상은 창작물에도 고스란히 반영이 되기 마련이다.

여자들을 극단적으로 배제한 마초적인 등장 인물들, 일상적으로 성차별적인 말을 내뱉는 주인공, 사회적 계급이 낮은 비주체적인 여성들, 몰개성하며 일괄적으로 예쁘기만 한 젊은 여성들.... 미디어믹스에 등장하는 여성혐오는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 그게 여성혐오였어?"라고 알게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오며, 여성혐오인지 모르고 넘기는 경우도 무수하다. 필자마저 어느 작품에서 어느 장면이 여성혐오라고 지적했을 때 그것이 정말로 여성혐오인지 모르고 지나가는 때가 있으니 마련이다.

자, 이제 단간론파 어나더에도 어떤 여성혐오들이 보이는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살펴보자.





- 남성에게 기대는 여성성

: 조력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 여성



쿠로카와의 뚜렷한 행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초고교급의 퇴마사? 음침하지만 말에 뼈가 있는 독설가? 사실은 밝고 희망찬 왈가닥?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직업과 성격이지, 행적을 나타내주지 않는다. 

챕터4가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단간론파 어나더에 있어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녀에게 얽힌 큰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이야말로 단간론파 어나더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의 떡밥일 것이다. 등등의 온갖 추측이 무성했다. 심지어는 흑막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오리무중했던 그녀의 정체는 초고교급의 맥거핀이였다.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하기는커녕, 떡밥을 회수하지도 않았으며, 챕터 5와 6의 거대한 스토리라인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키사라기라는 이레귤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쿠로카와가 지고 있던 작중에 모든 논란은 키사라기에게 전가되었다.

이때, 쿠로카와는 그저 키사라기라는 한 명의 남성의 '내조자'로서의 역할로 강등되었다. 쿠로카와는 키사라기가 하는 행동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옆에서 조언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임종에서까지의 스토리라인에는 그녀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이 없었다.






타이라 또한 그렇다. 타이라는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어느정도 의존적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희망봉 학원에 갇혀 기절해서 깨어났을 때도 모두에게 침착을 종용했으며,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며 모두를 격려했다. 그녀는 작중에서 마에다가 크게 흔들릴 때에도 어김없이 마에다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가끔 나타나는 마에다의 로우텐션을 재빠르게 잡아내어서 "그러면 안돼!" 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이정표를 잡아주고, 나아갈 길을 안내해주었다.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의 챕터5때까지만 해도, 절망하기 직전의 마에다를 도와 반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가 흑막의 도우미이자 마에다, 아니 최종 흑막인 우츠로의 심복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녀의 주체적 삶은 종말을 고한다. 우츠로에게 충성하고,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며, 헌신하였다. 우츠로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닌, 우츠로에 의한 삶을 살았다. 우츠로가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는 트리거. 우츠로라는 이름을 기억날 수 있게 하는 촉매제. 그것이 그녀의 역할이였다. 그녀도 키사라기의 발판이 되어버린 쿠로카와와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우츠로를 위하여 희생했다. 그녀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쿠로카와도 타이라도 모두 남성을 위한 도구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 성녀와 창녀 프레임

: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 속에 소멸된 보통의 여성




성녀-창녀 레이블링은 남성들의 대표적인 여혐 전략이다. 남성들의 판타지를 만족시켜주는 순종적인 여성은 개념녀(성녀), 내게 잘해주지 않는 여성은 된장녀(창녀)로 나누고는 한다. 보통의 여성들은 도달하지 못하는 너무나 높은 이상에 여성들을 맞추고, 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전부 뭉뚱그려 된장녀로 폄훼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맞추어 놓은 성녀의 프레임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남성들은 이 프레임에 어느정도 도달한 여성에게는 개념녀라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반대로, 이 타이틀과 전혀 어긋난 궤도를 달리는 여성들에게 남성들은 된장녀라는 멍에를 뒤집어씌운다. 

단간론파 어나더의 여성 캐릭터들은 이 이분법 프레임과 궤를 같이한다. 





타이라는 초고교급 메이드이다. 뛰어난 화술 실력과 봉사 정신으로 뭇 남성 고객들의 찬사를 받는다. 거기에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상냥하다. 그런 그녀의 행적 하나하나는 뭇 남성들의 로망이 된다. 

쿠로카와는 초고교급 퇴마사이다. 생뚱맞게 퇴마사가 서비스 직군이라니? 그러나 그녀의 역할은 퇴마사보다는 심리치료사에 가깝다. 불특정 다수가 겪는 귀신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엑소시즘이라는 행위로 해소시켜주는 것이 그녀의 특기이다. 

이노리는 초고교급 의사로서, 아픈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타인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항상 챙겨주고는 한다. 마에다는 이런 그녀를 백의의 천사라 평했다. 

작중 최고의 성녀로 일컬어지는 이라나미 또한 그렇다. 이라나미도, 전반부까지만 하더라도 코바시카와와 츳코미와 보케를 주고받는 역할을 도맡았다. 소위 만담 콤비로서, 코바시카와와 이라나미가 있어 단간론파 어나더의 험악한 분위기는 어느정도 풀어지고는 했다. 이런 상황이라도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말라며, 모두에게 웃음을 주는 역할. 그것이 이라나미의 사명감이었다.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이라나미는 평범한 만담 콤비의 일부에서 단간 어나더 최고의 구원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코바시카와가 이라나미가 쉽게 검정이 될 수 있도록 모든 트릭을 짜 놓았으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보다는 친구들의 목숨을 더 우선시했다.


위에 기술된 여성들은 친구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착한 성격에, 서비스 직업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그 캐릭터 개성에 그치기만 한 것일까? 여성에게 방긋 웃는 사회의 꽃인 서비스 직업이 강요되는 현실을 대입해보면 이것이 왜 여성 혐오인지는 쉽게 깨달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은 마지막까지 "성녀"로 남았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로지 희생하기만을 선택했고, 정작 그녀들 자신의 욕망을 크게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공익 속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 것이다.






반면, 마에다의 불호를 받고 있는 여성 캐릭터는, 타인에게 희생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좇는 여성이다.  단적인 예로 초고교급 치어리더인 토모리가 있다.

토모리는 마에다에게 상상 이상으로 골 때리고, 사고가 뒤틀려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작중 행적을 보면 민폐 캐릭터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거절하며 마이페이스대로 행동하는 캐릭터다. 항상 피곤하다고 조사에 불참하기 일쑤이며, 재판에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마에다에게 수시로 돈이 있냐고 물어보며 마에다의 얼굴만 보고 접근하며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챕터2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이라를 속였으며, 타이라를 죽이기 위하여 칼부림을 하고, 결국에는 타이라의 칼에 찔려 죽었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된장녀, 독한년 등등으로 평가한다. 단간 어나더 자타공인의 썅년. 그것이 토모리의 위치였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욕망을 좇아서 행동했을 뿐이였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나 돌아온 것은 비참한 죽음과 그녀를 향한 비난뿐이였다.

토모리와 이라나미의 평가가 대조적인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히 누구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건 희생을 한 이라나미는 성녀라고 추앙을 받는다.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한 토모리는 창녀라고 지탄을 받는다.

이 프레임 안에서, 보통의 여성은 없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며 만나는 욕망을 가진 보통의 여성들 대신, 극단적으로 희생 정신이 두드러지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나쁜 인상을 가지게 되는 여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 여성혐오가 빚어낸 이상한 캐릭터(번외)


잠시, 이 창녀 프레임을 가지고 있던 토모리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시선을 돌려보자.
토모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재미있다. 토모리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가장 나쁜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만 모아둔 최악의 여성상이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다. 미모와 애교를 겸비해 엄청난 인기를 독차지하는 팜므파탈이다. 어떠한 남성이던지간에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꼬실 수 있는 능력녀이다. 뭇 남성들이 자신에게 명품 가방, 지갑 등을 바치며 제발 자기와 교제해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추종자들까지 따라다닐 정도. 





하지만 그녀는 남자와 한번도 섹스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제작자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불우한 학창시절 때문에 남자를 혐오하게 되었다고 해뒀으나 이정도까지 자신의 욕망을 좇는 캐릭터가 저렇게 덜떨어진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은가. 특히나 '내 순결한 몸'이라는 말은 우습다. 요즘 세상에 순결함 타령이라니? 진심으로 제작자의 정조관념에 의심이 들 정도이다.

토모리는 전형적인 창녀 레이블링의 피해자이다. 그녀가 '섹스 미경험자'라는 남성들의 판타지를 갖추고 있는 것은, 그녀가 성녀에 바운더리에 들고싶었던 창녀로 묘사되는 것이다. 성녀가 되지 못해 불안해하는 창녀.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범주에 존재하는 창녀들을, 성녀에 들여 자신의 젠더 권력 하에 놓고 싶은 제작자의 무의식적인 욕구가 반영되어 있는 캐릭터이지 않을까.






- 남성이 허락한 여성성

: 진정한 여성성에 대한 고찰의 부족






하타노는 초고교급의 육상선수이다. 자신의 직업과 걸맞게도 그녀는 무인 기질이 있다. 강직하고, 보이시하고, 털털하며, 한편으로는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에 서툴다.그러나 하타노조차 남성들의 욕망의 재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타노의 자유행동에서 그녀는 마에다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대뜸 마에다에게 자신이 여성스럽지 못하냐며 반문한다. 하타노는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최대한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에다를 쓰러트리며 대뜸 자신에게 남성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여성다움이라는 것은 이성을 유혹하는 페로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청초하고 가련한 한떨기의 백합 같은 모습이 되고싶다며 마에다에게 거듭 자신의 여성성을 어필한다. 마에다는 그런 하타노를 천연 아가씨라고 평가한다.

하타노의 말대로, 여성스러움이라는 것이 청초하고 얌전한 모습만을 나타내는 것인가?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부장적인 질서에 순종하는 모습만이 여성스러움일까? 여성스러움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이 존재한다니? 

남성들의 시각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은 진정한 여성성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성에 대해 규제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무례한 시선이며,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에 대응하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하타노는 하타노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여성스러운 것이다. 보이시한 모습을 보이던, 청초한 모습을 보이던. 그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하타노라는 온전한 인격 자체가 여성스러운 모습이다. 

하타노는 남성이 허락한 여성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 맨스플레인

: 과연 여성은 남성에게 가르침 당할 대상인가?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로,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출처:위키백과)







단간론파 어나더라는 게임 안에서 악인의 역할을 도맡은 사람은 두 명이다. 동성 친구인 히가, 이성 친구인 토모리. 두 사람은 같은 악역이지만, 그 둘을 바라보는 마에다의 시선은 확연히 다르다. 

우선, 동성 친구인 히가를 보자. 마에다는 히가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히가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에게 지적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적절하게 맞장구쳐준다. 사실은 쟨 알고보니 괜찮은 놈이였어, 하면서 치켜세워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같은 악인 포지션인데도 이성 친구였던 토모리에게는 태도가 확실히 달랐다. 마에다는 그녀의 잘못을 망설임 없이 지적했다. 그녀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그녀는 자신에 의해 교정받아야할 대상이라고 느낀 듯했다. 마에다는 토모리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그녀의 일탈에 대하여 지적할 줄 아는 멋진 놈이였다. 그에 도취해 그녀의 행동을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말투로 지적한다. 마치 자신이 토모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되었다는 마냥 군다. 오만방자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는 기어이 토모리를 울리고 만다. 

맨스플레인 또한 여성의 대화의 주도권을 박탈하려는 남성들의 전략의 일부이다.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여성의 말을 무시하고, 비난을 가득 쏟아내는 것이다. 그녀들을 잔뜩 비판하며 남성은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는 한다. 

그녀들의 감정이 어떨지는 그들의 관심 밖이다. 오로지 자신이 대화에서 우위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 단 하나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 또한 전형적인 남성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이다.






맺으며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고찰을 통한 성숙한 생산자/소비자 되기


서술한 바와 같이, 희망봉 학원에 '진정한 여성'은 없었다. 남성에게 의존적인 여성만이 존재했고, 성녀들과 그에 도달하지 못한 창녀만이 존재했고, 여성성을 남성의 잣대로 평가당하는 여성만이 존재했고, 똑똑하고 되바라진 여성의 자리는 없었으며, 남성에게 가르침당하는 여성만이 남아있었다. 단간론파 어나더의 여성 캐릭터는 그 어느 누구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

단간론파 어나더가 확실하게 "남성향"을 타겟으로 잡은 것에 대해 인정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비판은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단간론파 어나더는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단순히 여성을 비하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만이 여혐이 아니다. 그저 남성에게 종속된 물건으로서만의 여성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혐이다. 이러한 시각은 또다른,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각에 가까운 작품으로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단간론파 어나더의 차기작 "슈퍼 단간론파 어나더"에서는 이러한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바람에서 마무리를 지어본다. 차기작의 주인공은 '소라'라는 이름의 여성이라고 한다. 과연, 소라는 남성들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하에서 지배당하는 여성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한 명의 사람이 될 것인가? 이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은 차기작의 완성도를 높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성 주인공이지만, 정작 여성 감상자가 이입을 못하는 아이러니한 작품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덧붙이자면, 소비자들도 마땅히 여성혐오적인 작품에 대해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끊임없이 소리를 내야 한다. 잊혀지지 않게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소비자는 질 좋은 컨텐츠를 소비할 권리가 있다. 소비자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 더 나은 컨텐츠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을 솔선수범해서 나서 일궈내야 다음 세대의 소비자들이 좀 더 나은 젠더 감수성을 가진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야말로 끊임없는 여성혐오에 대한 고찰을 멈춰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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